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주 이씨 (문단 편집) === [[대성팔족]]과의 연관성 === 이렇듯 조선 왕실의 근원에 대한 기원론적 고증에 있어서 한계는 분명해보이지만, 전주 이씨의 선원(先源)을 구성하는 씨족들의 경우 일부 선원선계를 통해서 밝혀지고 있기 때문에 가계도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다. 전주에 뿌리를 두고 있는 [[백제]] 지역의 토성(土性)이니만큼 백제계 씨족들과의 연관성이 주목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다름 아닌 [[백(성씨)|{{{#E3DDCB '''백씨(白氏)'''}}}]]이다. 우리나라의 백씨[* [[수원 백씨]], 남포 백씨, 대흥 백씨, 상당 백씨, 임천 백씨 등]는 백제에 입조한 중국계 가문인 예씨(禰氏)[* [[의자왕]]을 나당연합군에게 팔아넘긴 백제의 매국노인 [[예식진]]의 가문.]가 자리잡기 이전까지 [[웅진성]]을 본향 및 근거지로 삼고 있었던 백제의 대귀족 가문이자 팔성(八性)의 하나인 {{{#E3DDCB '''백씨(苩氏)'''}}}의 후손들로 강력하게 추정되고 있다.[* 백제에서 왕실과 혼인할 수 있었던 7개의 왕비족인 대성팔족의 하나였으며 [[한성백제]]의 멸망과 웅진성으로의 천도를 계기로 중앙에서 대두된 백제의 대귀족 씨족이다. [[무령왕]] 대에 이르러 [[백가]]의 반란으로 몰락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세력 자체는 유지한 것으로 보이며, 다만 웅진성이라는 핵심 본거지는 중국계 이주민 계열인 예씨(禰氏)들에게 넘어가게 된다. 웅진이 아닌 [[청주시|상당]], 대흥, 남포, [[수원]] 등으로 본관이 자리잡은 사실이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나라나 왜국으로 건너간 것이 일부 확인되는 국씨(國氏), 목씨(木氏), 사씨(沙氏) 등과는 달리 망명이나 포로 신세에 대한 기록이 없어 백씨들의 대다수가 통일신라에 잔류하여 [[한민족]]의 형성에 알게모르게 기여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다만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멸망 이전에 일본으로 넘어간 백씨들이 여럿 전해지고 있다. 여담으로 학계에서는 [[수촌리 고분군]]의 주인들이 이들 백씨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백제 멸망 이후 [[부여씨]] 왕실과 대성팔족 등을 비롯한 대다수의 백제 지배층은 고구려 왕족과 귀족들보다 더 낮은 관등인 5두품으로 주로 격하된 뒤 신라의 탄압과 감시를 피해 변성(變性)하거나 은성(隱性)한 정황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백씨(白氏)도 마찬가지다. 백씨 외에도 [[이천 서씨]], [[능성 구씨]], [[나주 임씨]] 등 여러 성씨족들이 있다.] 백제에서 백씨로서 이름을 남긴 이들로는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백가(苩加)]]와 달솔 백기(苩奇) 등[* 백제에서 왜로 건너가 노반건축 관련 기술을 전수해준 장덕(將德) 관등의 백제인 백매순(白昧淳)의 존재도 전해지고 있다. 본래 백씨(苩氏)인데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백씨(白氏)로 표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이 알려져 있으며 [[대성팔족]]의 한 축을 담당하던 대귀족 가문이었으니 여느 팔족(八族)[* 사씨(沙氏), 진씨(眞氏), 해씨(解氏), 국씨(國氏), 연씨(燕氏), 목씨(木氏) 등.]과 지방의 유력한 씨족들[* 흑치씨(黑齒氏), 귀실씨(鬼室氏), 억례씨(憶禮氏) 등.]처럼 [[부여씨|백제 왕실]]과의 혈연적 관계도 두터웠을 것이다.[* [[근친혼]]을 통해서 왕실과 왕족의 범위를 제한함으로 왕권의 위엄과 권위를 확보하려던 [[신라]]와 초중기의 [[고려]]와는 정반대로,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일찍이 왕실과 귀족간의 혼인이 주를 이루었으며 귀족 계층 전반으로 왕실의 혈통이 퍼지는 것을 굳이 억제하지 않았다. [[고구려]]에서는 대표적인 예로 [[명림홀도]]와 [[연정토]]가 있으며 [[백제]]에서는 [[흑치상지]], [[억례복류]], [[귀실복신]] 등의 선조들이 이러한 왕족과 귀족간의 혈연적 결합으로 태어난 후손들이다. 신라의 고위 왕족인 [[만명부인|만명공주]]와 혼인한 [[가야]] [[금관국]]의 [[김서현(신라)|김서현]]이라든지, 일찍이 [[경순왕]]에게 시집가 여러 김씨 본관의 조상이 된 [[태조(고려)|고려 태조]]의 장녀 [[낙랑공주(고려)|낙랑공주 왕씨]]라든지, 여말선초 때 [[노책]]에게 시집가 교하 노씨의 시조모가 된 고려의 고위 왕족인 경혜비 왕씨 등의 사례가 이례적인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성계를 비롯한 전주 이씨의 일원들이 이러한 부분들을 눈여겨보거나 의식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와 같이 전주 이씨의 상계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부여씨|백제 왕실]]과 [[대성팔족]]까지 연결고리가 이어지게 된다. -- 한번씩 돌아가면서 [[삼한일통]]하기 -- ▪︎5세 [[이입전]]의 부인인 백씨(白氏)[* 백탁(白卓)의 누이이다.]는 한림(翰林) 백광선(白光善)의 딸로, 본관은 남포(藍浦)다. ▪︎8세 [[이승삭]]의 부인도 백씨(白氏)로, 시랑(侍郞) 백광현(白光賢)의 딸이다. > [[고려|전조]]의 [[왕건|태조(왕건)]]가 [[훈요십조|후손에게 훈계]]를 전하면서 [[백제]][* [[후백제]]를 의미하기도 한다.] 사람을 쓰지 말라고 했는데, 지난번에 '''후손들이 그 훈계를 준수했더라면 [[전주 이씨|전주 사람]]인 전하께서 또한 어찌 오늘날이 있었겠습니까?'''[* 《태조실록》 권5, 태조 3년 2월 26일][* <훈요 10조>의 8조에 대한 해석을 떠나 당대 사람들의 인식을 반영한 이성계의 출자에 대한 평가다. 해당 문구는 [[왕씨 몰살]]이 발생하기 전 왕씨 몰살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나왔던 발언이다.] 당대의 인식은 함경북도 회령군 출신인 이성계를 어느 정도 '백제인'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성계 본인도 스스로를 '전주 출신'으로 여겼고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훈요 10조>의 해당 구절은 지역의 해석을 백제로 오해한 것으로 최근엔 지속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청주에 있었던 친[[궁예]] 세력에 대한 경고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이는 위처럼 나타나는 당대의 해석과는 상이하는 것으로, 고려에서는 이를 구 백제 땅으로 인식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실제로도 이성계 가문이 본인들의 정체성을 백제인으로 생각했다는 증거는 딱히 없는 상황이다.[* [[이성계]]가 등장할 즈음인 [[여말선초]] 때는 이전 [[여몽전쟁]]이라는 결정적인 계기로 삼국유민의식이 희석된지 오래였다. 다만 고려와 고려 왕실 차원에서는 꾸준히 고구려 계승의식이 확인되었으며 이는 [[요동 정벌]] 등과 같은 대외 영토확장 사업에서도 나타난다.] 그외 학계내 자료들에서도 전주이씨와 대성팔족 또는 백제를 깊게 연관시켜서 분석한 논문들은 따로 확인이 되지 않는다.[* 말그대로 크게 주목할만한 것이 아니므로 학계 입장에서는 크게 눈여겨 보지 않는다. 전주 이씨에 대성팔족의 피가 흘러도 결국 대성팔족이 선원(璿源)의 근본이 되는 집단이 아닌 여계(女系) 혈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본 문서처럼 전주 이씨와 [[경주 이씨]], 그리고 [[인천 이씨]]와의 관계를 더 주목하는 것이 사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